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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학습노트-대프랑스/미국 투쟁의 역사(5)

송덕호 · 2026.10.05

베트남학습노트-대프랑스/미국 투쟁의 역사(5)

베트남의 현대사는 외세의 침략과 이에 맞선 독립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하자 초기 저항을 이끈 세력은 전통 유학자들이었다. 1885년 함응이 황제의 격문을 계기로 시작된 ‘근왕운동’은 프랑스에 맞선 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근대적 무기와 조직을 앞세운 프랑스의 군사력을 넘어서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독립운동의 성격도 달라졌다. 판보이쩌우는 일본 유학을 통한 근대화와 무장 독립을 추구했고, 판쩌우찐은 교육과 개혁을 통한 민족의 역량 강화를 강조했다. 1930년에는 베트남국민당이 옌바이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켰지만 프랑스군에 진압됐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왕조 수호에서 근대적 민족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전환점은 호치민의 등장이다. 그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하고 광범위한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했다. 1941년 결성한 비엣민은 계층과 이념을 넘어 독립이라는 목표 아래 세력을 결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일본이 프랑스 식민통치 체제를 무너뜨리자 정치적 공백이 발생했고, 비엣민은 1945년 8월 혁명을 통해 하노이를 장악했다. 호치민은 9월 2일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독립은 곧바로 완성되지 않았다. 프랑스는 식민지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베트남에 재개입했고, 1946년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호치민과 보응우옌잡이 이끄는 비엣민은 도시를 내주고 산악과 농촌을 기반으로 장기전을 펼쳤다. 중국과 소련의 지원까지 더해지면서 전쟁의 균형은 서서히 바뀌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였다. 프랑스군은 요새를 구축하고 비엣민을 유인했지만, 보응우옌잡이 이끄는 병력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포병을 배치하고 프랑스군을 포위했다. 결국 프랑스군이 항복하면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통치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베트남의 분단은 새로운 전쟁을 불러왔다. 냉전 속에서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남베트남을 지원했고,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통일을 위한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1968년 뗏 대공세는 군사적으로는 큰 희생을 치렀지만 미국 사회의 전쟁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결국 미국은 1973년 파리평화협정 이후 철수했고,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베트남은 통일됐다.

베트남의 독립 과정은 단순히 한 나라가 외세를 몰아낸 이야기가 아니다. 전통적 왕조 수호에서 근대적 민족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를 결합한 대중운동으로 독립투쟁의 방식이 끊임없이 변화했다. 그 과정에서 베트남을 관통한 핵심은 이념 그 자체라기보다 외부 세력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는 자결의 요구였다.

베트남 현대사가 남긴 가장 큰 교훈도 여기에 있다. 강대국의 군사력과 국제정세가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그 나라의 역사와 사회 내부에서 형성된 정치적 의지와 민족적 열망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송덕호

본 내용은 저자의 허락으로 오이마켓 편집국이 축약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