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바꾼 역사와 문화
<제53화> 내 대신 흥정하는 AI — 에이전트 커머스의 시대

우리는 물건을 사려면 검색하고, 비교하고, 후기를 읽고, 결제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나 대신 해주는 존재가 생긴다면 어떨까요. 이번에는 기록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를 예측해 그려 보겠습니다.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 한 사람이 자신의 AI 비서에게 말합니다. 다음 달 여행에 쓸 카메라 하나 사줘. 예산은 이만큼, 가벼운 걸로. 그러자 AI는 혼자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수백 개 상품의 사양을 몇 초 만에 비교하고, 수만 개의 후기를 읽어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고, 여러 판매처의 값을 견주고, 심지어 판매자의 AI와 직접 흥정까지 합니다. 잠시 후 AI가 답합니다. 세 곳을 협상해 가장 싼 곳에서 주문했고, 사은품도 받아냈습니다. 사람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반대편입니다. 판매하는 쪽에도 AI가 있어서, 재고와 수요를 실시간으로 계산해 값을 부르고 흥정에 응합니다. 사는 것도 AI, 파는 것도 AI. 인간은 그저 원하는 것을 말했을 뿐, 거래의 실무는 기계들끼리 처리하는 것입니다.
방금 본 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측입니다. 그런데 이 낯선 풍경이, 사실은 이 시리즈에서 여러 번 본 장면의 되풀이입니다. 6화의 침묵 교역을 기억하시나요. 말이 통하지 않는 두 집단이 규칙만으로 거래를 완성했습니다. AI끼리의 거래도 똑같습니다. 사람의 흥정 없이 정해진 규칙, 곧 프로토콜에 따라 기계들이 값을 주고받는 것이니까요. 5화의 소그드 상인들이 평판으로 낯선 이를 믿었듯, AI 시대에는 어떤 AI를 믿을 수 있는지 가려주는 새로운 신용 장치가 필요해집니다. 그리고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떠오릅니다. 거래의 실무를 AI가 다 한다면, 사람은 이 시장에서 무엇을 하는가. 답은 이렇습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정하는 일, 어떤 AI에게 맡길지 고르는 일, 그리고 그 거래가 공정한지 판단하는 일. 실무는 기계에게 넘어가도, 방향을 정하는 일은 사람의 몫으로 남습니다.
자, 오늘의 결론이자 8부의 시작입니다. 기술은 세상의 장면과 장면을 바꿉니다. 사람이 직접 발품 팔아 흥정하던 장면은, AI가 사람을 대신해 협상하는 장면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것이 5차산업혁명이 열어젖히는 새로운 거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4,000년의 역사가 알려준 원리는 여기서도 그대로입니다. 거래의 본질은 신뢰이고, 신뢰를 설계하는 자가 시장을 얻습니다. AI가 실무를 가져갈수록, 그 AI를 믿을 수 있게 만들고 사람이 진짜로 원하는 것을 읽어내는 능력이 더 값져집니다. "너는 뭐 먹고 살거니?"의 쉰세 번째 힌트는 이것, AI에게 시킬 수 있는 일과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을 구별하고, 후자에 서라는 것입니다. 철이네 오이마켓이 다음 장면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사진: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CC BY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