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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유행한 몽골풍, 원나라에 퍼진 고려양

고려 충렬왕과 원나라 제국대장공주 사이에서 난 충선왕.
MBC TV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의 한장면
몽골족은 13~14세기에 인류 역사상 최대 영토의 제국을 건설했다. 서쪽 오스트리아에서부터 동쪽 끝 한반도와 사할린섬까지, 남쪽으로는 인도네시아 자바섬까지 몽골 기병에 무릎을 꿇었다.
‘팍스 몽골리카’로 불리는 이 시대에는 화약이 서양에 전래되는 등 동서양 문물과 사람의 교류가 대폭 늘어났다. 민족 간 통혼도 활발히 이뤄졌다. 이탈리아의 마르코 폴로가 아시아를 탐험한 뒤 ‘동방견문록’을 쓴 것도 몽골족의 원나라 때였다.
고려는 9차례에 걸쳐 몽골군의 침입을 겪은 끝에 1270년 항복했다. 고려 24대 원종은 원나라 세조(쿠빌라이)에게 청해 부마국이 됐다. 스스로 황금씨족(태조 칭기즈칸의 후손)이라고 칭하며 아무나 사돈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원나라 황실이 고려 왕을 사위로 삼은 것은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고려의 끈질긴 항쟁과 꺾일 줄 모르는 자주정신을 의식해 양국 간 우호를 두텁게 하려는 조치였다. 세조가 황제 자리를 놓고 형제들과 다툴 때 자신을 도와준 것에 보답하는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로써 고려는 제후국으로 위상이 격하되고 내정간섭이 본격화하긴 했으나 다른 정복지와 달리 국체와 왕실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후 25대 충렬왕부터 31대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7명의 왕은 원나라 황제의 딸과 결혼했다. 그 사이에 태어난 ‘혼혈왕자’들은 요즘 말로 하면 다문화가정 자녀였다. 이들은 외가인 원나라 황실로 보내져 교육을 받고 몽골 문화를 익혔다. 결혼이주여성인 원나라 공주들과 그를 따라온 시종들은 몽골 풍습을 고려에 전파했다.
원종의 맏아들인 충렬왕은 부인과 장성한 아들을 두었으나 38세의 나이로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해 세조의 사위가 됐다. 그의 아들 충선왕은 황제의 외손자 가운데 첫번 째 임금이었다.
원나라 공주가 왕자를 출산하지 못해 고려 왕비가 낳은 아들이 임금이 된 경우도 있었다. 역대 왕들의 몽골계 혈통 비율을 따지면 충선왕 50%, 충숙왕 75%, 충혜왕 37.5%, 충목왕 68.75%, 충정왕 18.75%, 공민왕 37.5%, 우왕 18.75%이다.
원나라 황실에 바쳐진 고려 공녀(貢女)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가 되고 그 아들이 황제로 등극하는 일도 있었다. 고려 출신 환관의 주선으로 궁녀가 된 기승냥은 원나라 황제 혜종의 총애를 받아 정비(기황후)로 책봉된다. 아들도 북원(명나라에 밀려 몽골 초원지대로 돌아간 이후의 왕조)의 초대 황제 소종으로 등극했다. 소종비 권황후와 김황후도 고려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양국 간에 많은 사람이 오가다 보니 문화와 풍습에도 서로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에는 왕실과 귀족을 중심으로 이른바 몽골풍(蒙古風)이 유행했고 민간에까지 파급됐다.
전통 혼례 때 신부가 머리에 쓰는 족두리와 뺨에 찍는 연지, 만두·설렁탕·소주 등의 음식은 몽골에서 전래된 것이다. 왕과 왕비를 일컫는 ‘마마’, 사냥용 매의 발목에 다는 이름표 ‘시치미’, ‘벼슬아치’나 ‘장사치’처럼 사람이나 직업을 뜻하는 접미사 ‘치’ 등 지금 쓰는 어휘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반대로 한류(韓流)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고려양(高麗樣)도 있었다. 수많은 고려 공녀와 환관이 끌려가 원나라 상류사회에 문물과 풍속을 전파한 것이다. 고려가 원나라의 속국이긴 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훨씬 성숙하고 세련돼 인기가 매우 높았다.
한복 특유의 풍성한 치마와 짧은 저고리, 약과 등의 고려병(高麗餠), 시루에 떡을 찌는 것, 상추에 쌈을 싸서 먹는 것 등이 퍼져 나갔고 청자·나전칠기·먹·종이 등의 수출도 활발했다.
기록에 남은 귀화인들도 있다. 제국대장공주의 시종으로 1274년 고려에 들어온 위구르인 삼가는 여러 차례 무공을 세워 벼슬과 봉토를 받고 장순룡으로 개명했다. 덕수 장씨는 그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함께 왔다가 눌러앉아 인후로 이름을 바꾼 몽골인 훌라타이는 연안 인씨의 시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