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기회
조선 건국을 도운 이방인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성리학 이념으로 개혁을 추구한 신진 사대부들의 추대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병권을 장악한 강력한 군사력 ▲홍건적과 왜구를 잇달아 물리쳐 백성에게서 얻은 인기 등을 바탕으로 새 왕조를 열 수 있었다.
조선 개국공신은 55명이다. 1등공신 20명, 2등공신 13명, 3등공신 22명이다. 공신록에는 이방인의 이름도 있다. 1등공신 이지란, 2등공신 이민도, 3등공신 임언충 세 명이다.
고려에 비해 국정 기조가 폐쇄적이던 조선이 이방인들을 개국공신에 봉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지란은 유일하게 1등공신에 올랐을 뿐 아니라 공신 가운데 가장 많은 토지를 하사받았다. 얼마나 공로가 컸기에 이런 파격적인 대접을 받았을까.
그 비밀은 이성계의 출신에서 비롯된다. 전주에 살던 이성계의 4대조 이안사(목조)는 삼척을 거쳐 원산으로 이주했다가 고려를 버리고 원나라에 투항해 지역 군벌이 됐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 할 때 이안사의 손자이자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환조)은 다시 고려에 귀화한 뒤 전공을 세워 벼슬까지 얻었다.
이지란의 본명은 퉁두란이다. 청해(함경남도 북청) 일대를 근거지로 한 여진족 족장의 아들로 무술 실력이 빼어났다. 젊은 시절 사냥한 사슴을 놓고 이성계와 다투다가 활쏘기 대결에서 패하자 의형제 결의를 맺었다고 한다.
이성계보다 4살 더 많았으나 동생이자 부하를 자처하고 이성계 휘하로 들어갔다. 1371년 고려에 귀순해 이지란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성계와 같은 전주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가 이지란이 청해군(靑海君)으로 봉해진 뒤 청해 이씨 시조가 됐다.
이지란은 1380년 이성계를 따라 왜구 토벌에 나섰다. 남원 황산대첩에서 중무장한 왜장 아지발도의 활약으로 고려군이 고전할 때 이성계가 화살로 왜장 투구 끈을 맞혀 투구를 벗겨내자 곧바로 이지란이 머리를 명중시켜 전세를 뒤집었다.
이밖에도 이성계를 따라 숱한 전투를 치르며 전공을 세웠고 이성계 목숨을 구해준 일도 여러 번이었다. 위화도 회군 때도 출전해 이성계를 도왔다. 조선 건국 후 높은 벼슬을 두루 지내다가 이성계가 왕위를 내놓고 함흥으로 낙향할 때 동행했다. 둘째부인 곡산 강씨가 이성계 계비 신덕왕후의 조카여서 이성계는 이지란의 처고모부이기도 하다.
역사학계 일각에서는 “이성계가 원나라 동북 지방의 고려계 군벌이었으며, 조선은 북방 유목 전통을 기반으로 건국한 나라였다”는 학설을 제기하고 있다.
북방 유목민에는 몽골족뿐 아니라 여진족도 포함된다. 이성계 군대의 최정예 부대는 이지란이 이끄는 여진족 기마군단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이지란의 건의로 조선인과 여진족의 결혼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2등공신 이민도는 중국 한족이다. 북경에 왔다가 돌아가는 고려 사신을 따라 이주했다. 의술과 점술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건국에 참여한 공로로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졌다. 상산은 오늘날 경북 상주에 해당한다. 상산 이씨는 그를 시조로 모신다. 같은 한족인 임언충은 역관 출신으로 이성계 막하에서 활약했다.
개국공신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빼놓을 수 없는 이주민 공신이 위구르족 설장수다.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고려로 피란했다가 경주 설씨(偰氏)의 시조가 됐다.
중국어와 몽골어에 능통해 원·명 교체기 고려와 조선 조정에서 모두 중용됐다. 조선 건국 직후에는 8차례나 사신으로 명나라를 방문해 외교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소학(小學)을 중국어로 해석한 직해소학(直解小學)을 지어 중국어 교육 발전에도 이바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