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기회
최초의 의료선교사 알렌의 두 얼굴

(좌)호러스 알렌, (우)알렌과 그의 아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미국 개신교단은 의료선교사 파송을 준비한다. 선교 미개척지인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면 앞선 근대 의술을 베푸는 게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884년 4월 미국 북장로회는 조선에 파견할 의료선교사로 존 헤론을 임명했다. 그러나 그가 부임을 준비하는 도중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호러스 뉴턴 알렌(한국식 이름은 안련·安連)이 북장로회의 허락을 얻어 9월 14일 부산항에 들어왔다. 합법적인 경로로 내한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알렌이 최초이자 유일한 의사(양의·洋醫)였다. 나이가 많고 아내가 병약한 루시어스 푸트 조선 주재 미국공사가 특히 그를 환영했다. 조선 조정은 개신교 선교를 공식적으로 허가하지 않아 푸트 공사는 고종에게 알렌을 미국공사관 부속의사로 소개했다.
입국한 지 두 달여 만인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알렌은 개화파의 칼에 찔려 사경을 헤매던 민비(훗날 명성황후로 추존)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해 소생시켰다. 이 일로 신임을 얻어 고종과 민비의 주치의가 됐다.
고종은 알렌에게 서양식 병원 설립을 부탁했다. 갑신정변 주모자 홍영식의 재동 집을 개조해 1885년 4월 10일 진료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광혜원이라고 부르다가 제중원으로 바꿨다. 부산 제생의원(부산대병원 전신)을 비롯해 개항장마다 일본이 설립한 근대식 병원이 들어서긴 했지만 서양식 국립병원으로는 제중원이 최초였다.
운영 책임과 실무는 조선 관리들이 담당했고, 알렌이 조선인 조수들을 데리고 진료를 도맡았다. 그해 5월 내한한 미 북장로회 소속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미 감리회 소속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가 진료를 도왔다. 첫 의료선교사로 임명됐던 헤론은 6월 20일 제물포항에 도착해 제중원에 부임했다.
알렌은 1886년 3월 29일 제중원의학당도 개설했다. 병원과 학교도 구리개(을지로입구)로 확장 이전했다. 제중원의학당은 학생 16명으로 출발했으나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거나 졸업 후 관료로 전직해 의사를 배출하지는 못했다. 그나마 1890년 헤론이 이질에 걸려 숨지는 바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이후 찰스 빈턴에 이어 올리버 에이비슨이 제중원장으로 부임했다. 에이비슨은 조선 조정으로부터 제중원 운영권을 넘겨받은 뒤 실업가 루이스 세브란스의 기부를 토대로 서울역 앞 복숭아골(현재 연세대재단빌딩 자리)에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인 세브란스기념병원을 세웠다. 제중원의학당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명했으며 1957년 연희대와 통합해 연세대가 됐다.
알렌은 의료와 선교보다는 관직이나 사업에 관심이 더 많았다. 1887년 11월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을 수행하는 서기관으로 임명돼 미국으로 건너갔다. 박정양이 청나라의 압력을 이겨내고 당당한 독립국 외교관으로 임무를 해낼 수 있었던 데는 알렌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평가된다. 1889년 조선으로 돌아와 다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다가 1890년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 서기관을 맡았다.
그 뒤로도 미국 부총영사, 미국공사 겸 총영사, 미국 특별전권공사를 역임하다가 한국 문제를 놓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논쟁을 벌인 뒤 1905년 6월 9일 본국으로 소환됐다. 미국에서 의사로 생활하던 중 1932년 12월 11일 오하이오주에서 숨졌다.
1900년 영국 왕립 아시아협회 조선지부를 결성해 회보를 발행하는가 하면 ‘한국 설화(Korean Tales)’, ‘한국 풍물(Things Korean)’, ‘한국의 각성(The Awakening of Korea)’ 등의 저서를 남겼다.
미국 외교관이라는 지위와 조선 왕실의 신임을 바탕으로 1895년 운산금광 채굴권, 1896년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낸 뒤 각각 미국 사업가와 일본에 팔아넘겨 거액을 챙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