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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글로벌 국가이자 다문화 사회였다

칠장사 명부전 궁예벽화
우리나라 국호는 대한민국(약칭 한국)이지만 중국·일본 등 한자 문화권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코리아(Republic of Korea)라고 불린다. 나라에 따라서는 Corea, Coree, Koreya라고 쓰고 꼬레아, 꼬레, 코레야라고 발음하기도 한다.
북한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약칭 조선)이라는 정식 국호가 있으나 대외 명칭은 코리아(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다.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에 남북한이 단일팀으로 출전할 때 국명은 코리아로 쉽게 합의됐다.
코리아는 10세기부터 500년 가까이 왕조를 이어온 고려에서 유래됐다. 이 시기에 비로소 우리나라가 서양에 알려진 것이다. 학자들은 당시 우리나라와 교역하던 이슬람 상인들이 고려를 아랍어로 ‘쿠리야’라고 부른 것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개방국가를 지향했다. 태조 왕건은 해상 무역으로 세력을 키운 호족 왕륭의 아들이다. 출신지 송도(송악)를 도읍으로 삼으면서 이름도 ‘열린 도시’란 뜻의 개성(개경)으로 바꿨다. 각 지역 호족들과 손잡은 것은 물론 신라 왕족들도 모두 포용하고 숙적인 후백제의 견훤마저도 받아들였다.
왕건은 후고구려의 궁예를 몰아내고 918년 6월 15일 고려를 건국한 뒤 935년과 936년 신라와 후백제를 차례로 병합해 삼국을 통일한다. 그에 앞서 고구려 유민이 말갈족과 함께 세운 발해가 926년 거란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자 934년 발해 세자 대광현은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투항한다.
그 뒤로도 거란족과 여진족이 각각 요나라와 금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전란을 피해 고려로 귀화하는 북방민족의 발길이 이어진다. 8대 임금 현종 때인 1017년 말갈족 목사가 부락민을 거느리고 귀순해 작위를 내렸으며, 거란족 매슬 등 14명이 국경을 넘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고려 건국 후 요·금 교체기인 12세기 초까지 약 200년간 17만 명가량의 이민족이 고려로 이주했다, 이는 당시 추정 인구 200만 명의 8.5%로, 지금의 국내 체류 외국인 비율 4.7%보다 훨씬 높다.
38회에 걸쳐 12만2686명이 이주한 발해계가 73%로 가장 많고 다음은 여진계 4만4226명이었다. 정복민인 거란계도 1432명이었으며, 5대10국과 송나라 한족은 42회에 걸쳐 155명이 귀화했다. 13세기 몽골 침입과 원나라 지배 이후로는 몽골계 이주가 늘어났다.
이주민은 남방과 서역에서도 들어왔다. 고려가요 ‘쌍화점’ 가사에 “만둣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 회회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회회아비는 이슬람 계통의 상인을 일컫는다.
개경 외항이던 예성강 하구 벽란도는 중국·일본은 물론 동남아와 아라비아 상인까지 북적거리는 국제도시였다. 벽란도를 중심으로 동서양 물자와 인력의 교류가 활발해 우리나라에도 서역인이 적지 않게 들어온 것으로 짐작된다.
15세기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성씨 277개 가운데 우리나라 고유 성씨가 147개이고 나머지 130개는 귀화 성씨라고 한다. 이 가운데 신라 때 40개, 고려시대 60개, 조선시대 30개 정도가 생겨났다.
세월이 흐를수록 교통이 발달한 것을 감안하면 조선보다 고려가 훨씬 개방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오는 자는 막지 않는다’는 내자불거(來者不拒)는 태조 이래 고려 역대 왕들의 국정 철학이었다.
이 같은 개방 정책으로 고려는 다문화 사회가 됐고, 그 덕에 풍요로운 문화를 가꿀 수 있었다. 고려대장경, 고려금속활자, 고려청자, 고려불화, 고려인삼 등은 세계인이 알아주는 명품 브랜드가 됐다. 이와 함께 고려도 글로벌 국가로 이름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