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기회
외국인 건의로 시작된 우리나라 과거제

KBS 드라마 '제국의 아침' 中
고려의 4대 임금 광종(재위 949~975)은 조선 3대 임금 태종(재위 1400~1418)과 닮은꼴이다. 광종은 태조 왕건의 넷째 왕자로 태어났으나 형제들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왕위에 올랐고, 개국공신인 호족들을 제거해 왕권을 강화하고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광종 7년(956년) 중국 북부에 세력을 떨치던 후주의 사신단이 고려를 방문해 임무를 마치고 귀환했다. 사신단 가운데 쌍기는 병이 나서 일행과 함께 돌아가지 못했다. 광종이 불러 대화해보니 식견이 뛰어났다. 후주 황제에게 신하로 삼고 싶다고 요청해 허락받았다.
한림학사로 등용된 쌍기는 과거제 도입을 건의했다.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과 글쓰기 능력을 평가해 관리를 선발하자는 것이다. 광종은 958년 과거제 실시를 명령했고, 쌍기는 출제부터 심사까지 전 과정을 관장했다. 쌍기가 고려 조정에서 중용되자 아버지 쌍철도 959년 고려로 귀화했다. 요즘 말로 하면 ‘초청 이민’인 셈이다.
과거제가 자리 잡으면서 그때까지 벼슬을 독차지하던 귀족이나 공신들의 세력은 약해졌고 폭넓게 인재들이 발탁돼 국가 운영 능력이 향상됐다. 과거제는 나중에 성리학 위주의 경직성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 등 폐단을 드러내긴 하지만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1천 년 가까이 고려와 조선 왕조 관료제의 근간이 됐다.
과거제는 중국 수나라 문제(재위 581~604) 때 처음 등장했다. 이전까지는 혈통 위주로 관리를 추천하고 관직을 세습했다. 평민이나 노예가 전투에서 공을 세워 출세하거나 주군의 눈에 들어 깜짝 발탁되는 사례는 극히 예외적이었다. 공부할 여건이 되는 사람에게 한정되긴 하지만 평민도 시험에 합격하기만 하면 벼슬길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당나라에 들어서는 빈공과를 두어 응시 대상을 신라, 발해, 페르시아 등 외국인으로도 확대했다. 토황소격문으로 이름을 떨친 최치원이 여기에 합격해 지방관을 지냈다. 중국의 과거제는 송나라 때 완전히 정착했고 청나라 광서제 때인 1905년까지 1300년이나 지속됐다.
과거제는 일본으로도 전파됐으나 9~11세기 헤이안 시대 제한적으로 실시됐다가 12세기 막부 체제가 성립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베트남은 고려보다 늦은 1075년에 실시해 1919년까지 유지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광종 이전인 통일신라 때도 시험을 통해 관리를 등용하려던 시도가 있었다. 원성왕이 788년 시행한 독서삼품과가 그것이다. 유교 교육기관 국학에 다니던 학생에게 유교 경전 시험을 치르게 한 뒤 상중하 3등급으로 나눠 등용했다.
그러나 일종의 졸업시험인 데다 이를 통해 임명되는 관직도 지방관에 한정해 과거제와는 엄연히 다르다. 당시 중앙관직과 고위직은 진골이 독점하고 있었다. 최치원도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려 폭넓게 인재를 등용할 것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과거제는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신라에서 실시되지 못했다. 개방국가인 고려에 들어와서도 스스로 시행하지 못하고 외국인 관리의 건의에 따라 도입된다. 자극은 외부에서 오고 개혁은 스스로 이루기 어려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