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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으로 망명한 비운의 왕 온사도

이희용 · 2024.04.09

조선으로 망명한 비운의 왕 온사도

페르시아제국 사산왕조의 마지막 왕자 피루즈는 신라로 망명했다. 베트남 리왕조의 왕자 리롱뜨엉(이용상)은 고려를 망명지로 택했다. 14세기 말에도 우리나라로 망명한 왕이 있었다. 류큐(琉球) 산남국의 왕 온사도(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승찰도)다.

류큐열도가 1879년 일본 오키나와현으로 편입되기 이전에는 류큐국도 중국에 조공하며 자치를 보장받는 어엿한 독립 왕국이었다. 한·중·일 삼국과 동남아를 잇는 해상 중개무역으로 번성을 누리며 일본 본토와는 언어와 풍속 등이 다른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했다.

류큐의 역사 기록은 12세기 들어와서야 시작된다. 1273년 제주도에서 고려와 원나라(몽골) 연합군에 패한 삼별초군의 일부가 망명해 류큐국을 세웠다는 학설도 있다. 오키나와 산성은 고려 성곽과 축성방식이 비슷하며, 류큐 왕궁 유적에서는 고려의 명문(銘文) 기와가 출토되기도 했다.

14세기 초에는 우리나라 삼국시대처럼 남부 지방의 산남국(山南國), 북부의 산북국(山北國), 중부의 중산국(中山國) 세 나라로 나뉘어 각축을 벌였다. 삼국이 정립한 1322년부터 중산국이 두 나라를 병합해 통일을 이루는 1429년까지 100여 년간을 삼산시대(三山時代)라고 부른다.

산남국의 왕 온사도는 숙부 왕영자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1394년 조선으로 망명했다. 왕영자는 조선에 조공한 중산국 왕에게 부탁해 산남왕을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했으나 태조(이성계)는 이를 거절했다.

왕영자가 중산국과 손을 잡고 자신에게 저항하는 세력을 탄압하자 1398년에도 온사도를 따르던 산남국인 15명이 조선으로 이주해왔다. 온사도 일행은 바다에서 남강을 거슬러 올라가 진양(경남 진주)에 자리를 잡았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조는 의복과 곡식을 내려 정착을 돕는가 하면 어전회의에도 두 차례나 참여시켰다.

조선 조정의 환대와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온사도는 그해 10월 15일 후손 없이 숨졌다. 그를 따라온 산남국인 가운데는 후손을 남긴 이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다.

온사도에 관한 내용 말고도 고려와 조선의 사서에는 류큐국이 자주 등장한다. 왜구에게 붙잡혀 류큐에 팔려간 고려인을 송환했다거나 조선인이 풍랑을 만나 류큐에 표착했다는 등의 기록이다. 반대로 표류하던 류큐인이 제주도나 경상도에 상륙하기도 했다.

오키나와는 제주도에서 900㎞가량 떨어져 있지만 쿠로시오해류와 계절풍을 이용하면 배로 며칠 만에 갈 수 있다. 오키나와에도 고려인이나 조선인의 후손이 살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류큐인의 후손이 존재하겠지만 모두 그 지역에 동화돼 흔적을 찾기 어렵다.

다만 한국과 오키나와의 깊은 연관성을 말해주는 단서는 몇 가지 있다. 돼지 피를 그물이나 주낙 등에 발라 물고기를 잡는 제주도의 전통적인 어로 방식이 오키나와에 남아 있다고 한다.

오키나와의 장례 풍습도 진도 등 호남의 섬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초분(草墳)과 똑같다. 초분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풀로 덮어 1~3년간 그대로 두었다가 살이 다 썩은 뒤 뼈만 추려 땅에 묻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