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바꾼 역사와 문화
<제59화> 기계가 이겨도 사람들은 사람을 본다 — 인간만이 팔 수 있는 것

AI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작곡까지 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여전히 손뜨개 목도리에 웃돈을 내고 가수의 라이브 공연에 줄을 섭니다. 기계가 더 잘하게 된 뒤에도 팔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가장 먼저 부딪힌 날, 1997년 5월 뉴욕으로 가 보겠습니다.
맨해튼의 빌딩 35층에 마련된 대국장. 세계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가 체스판 앞에 앉아 있습니다. 상대는 사람이 아니라 방 안의 검은 기계, IBM의 슈퍼컴퓨터 딥블루입니다. 최종 6국, 챔피언은 시작 19수 만에 무너집니다. 그는 두 손을 들어 보이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인류 대표가 기계에게 진 첫 공식 매치가 끝난 순간, 장내는 환호도 야유도 아닌 술렁임에 잠겼습니다. 다음 날 신문들은 인간 지성의 시대가 끝났다고 썼고, IBM의 주가는 뛰어올랐습니다. 사람들은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이제 체스는 끝난 것인가. 기계가 더 잘 두는 게임을, 누가 계속 두고 누가 계속 보겠는가.
방금 보신 장면은 중계 영상과 기보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실제 기록입니다. 뒷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카스파로프는 2국에서 기계답지 않게 깊은 수를 둔 딥블루를 의심하며 사람이 개입한 것 아니냐고 항의했고, IBM은 재대결 요청을 거절한 채 기계를 해체해 박물관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진짜 반전은 그다음 역사입니다. 체스는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기계 덕분에 누구나 세계 최강의 스승을 곁에 두게 되자 체스 인구는 폭발했고,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체스를 두는 사람은 역사상 가장 많습니다. 사람들은 기계끼리의 완벽한 대국이 아니라, 실수하고 땀 흘리고 시간에 쫓기는 인간의 대국을 봅니다. 자동차가 사람보다 빨라진 지 백 년이 넘었지만 우리가 여전히 100미터 달리기에 열광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카스파로프 자신도 패배 이듬해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인간과 기계가 한 팀을 이루는 켄타우로스 체스입니다. 실제로 2005년의 한 프리스타일 대회에서는 평범한 컴퓨터를 든 아마추어 두 명이 그랜드마스터도, 슈퍼컴퓨터 단독 팀도 꺾고 우승했습니다. 기계를 잘 부리는 인간이 가장 강했던 것입니다.
자, 오늘의 결론입니다. 기술은 세상의 장면과 장면을 바꿉니다. 기계가 인간을 이긴 장면은 인간의 퇴장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성능의 시장은 기계에게 내주었지만, 이야기의 시장은 오히려 커졌습니다. 우리가 물건과 서비스에 값을 치를 때, 그 값의 일부는 언제나 성능이 아니라 사람에게 지불됩니다. 누가 만들었는가,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가, 저 사람은 오늘 이길 것인가. AI가 모든 성능을 값싸게 만드는 5차산업혁명 시대에는 거꾸로 이 몫이 상품의 중심이 됩니다. 손맛, 진심, 긴장, 서사. 기계가 흉내 낼수록 원본 인간의 값은 올라갑니다. "너는 뭐 먹고 살거니?"의 쉰아홉 번째 힌트는 이것, 기계와 성능으로 경쟁하지 말고 기계를 부리며 인간이라는 사실을 파는 쪽에 서라는 것입니다. 철이네 오이마켓이 마지막 장면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사진: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CC BY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