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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은 닫아도 '작은 기쁨'엔 연다… 불황 속 소비 키워드 '글리머'

정원연 · 2026.11.06

지갑은 닫아도 '작은 기쁨'엔 연다… 불황 속 소비 키워드 '글리머'

고물가와 고금리로 가계의 씀씀이가 줄어드는 가운데, 일상에서 작은 기쁨을 주는 소비만큼은 오히려 늘고 있다. 글로벌 트렌드 분석기업 WGSN이 제시한 '글리머(Glimmer)'가 주요 소비 키워드로 자리 잡은 것이다.

글리머는 원래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을 뜻한다. 미국 심리치료사 뎁 다나가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자극인 '트리거(trigger)'의 반대 개념으로 이 말을 썼다. 부정적인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안정감을 주는 작은 긍정의 순간이라는 뜻이다. WGSN은 2024년 이 단어를 주요 소비자 마인드셋으로 선정했다.

배경에는 지친 소비자가 있다. WGSN이 2022년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65%는 생활비 상승, 재정 불안, 지정학적 긴장, 기후 불안 등이 겹친 '복합위기' 속에서 번아웃을 느낀다고 답했다. 30세 미만에서는 48%가 직장에서 소진감을 호소했다. WGSN은 이런 집단적 번아웃이 소비자를 '작은 기쁨의 순간'으로 이끌 것이라고 내다봤다.

경제학 개념인 '립스틱 효과'와 닮은 점이 많다. 립스틱 효과는 불황기에 소형 사치재의 판매가 오히려 늘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집이나 명품 가방처럼 큰 지출이 부담스러워진 소비자들은 10만~30만원대 니치 향수, 프리미엄 화장품, 1인당 5만~12만원짜리 디저트 코스 같은 '스몰 럭셔리'로 눈을 돌리고 있다. 평소에는 무지출 챌린지로 지출을 아끼다가도 자신이 가치를 두는 영역에는 과감히 돈을 쓰는 '양극화 소비'가 뚜렷해진 것이다.

가장 빠르게 반응한 곳은 뷰티업계다. 비용과 부피가 작으면서도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꾸미기' 소비가 글리머의 대표적인 형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다이어리를 꾸미는 '다꾸', 휴대폰을 꾸미는 '폰꾸'에 이어 화장품을 꾸미는 '화꾸'까지 등장했다. 색조 브랜드 퓌(fwee)는 팝업스토어에서 미니 틴트 키링을 사은품으로 주며 '오픈런' 열풍을 일으켰고, 어뮤즈와 엔트로피 등은 가방이나 벨트에 거는 키링형 립 제품을 내놨다. 패션 플랫폼 에이블리에서는 '립밤 키링' 검색량이 1년 전보다 37.5배 늘었다. 최근에는 디올, 지방시 같은 명품 브랜드도 장식형 립밤과 팩트 벨트를 선보이며 이 흐름에 뛰어들었다.

이 흐름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WGSN은 2026년 핵심 트렌드로 '진지하지 않음(Unserious)'을 꼽았다. 글리머가 한 단계 더 나아가 엉뚱하고 유쾌한 재미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단순히 제품의 기능을 파는 데서 나아가 소비자의 감정을 어루만지는 경험을 설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불황이 길어질수록 '작지만 확실한 위로'를 파는 기업이 내수 시장의 승자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