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바꾼 역사와 문화
<'100년기업' 제11화> 그때 그 상인의 장부가 사실은 - 이념, 모든 것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

제1화에서 만난 프란체스코 다티니를 다시 불러온다. "신과 이윤의 이름으로"라는 여덟 글자를 장부 맨 위에 적어 넣었던 그 상인. 그가 지킨 하나의 원칙이 그를 유럽 전역의 상인들과 거래하게 해주었다는 이야기는, 사실 백년기업 연구가 가장 먼저 가리키는 자리였다.
짐 콜린스와 제리 포라스는 1989년부터 6년에 걸쳐 미국의 "비전기업" 18개사를 조사했다. 비전기업 하나마다 같은 업종, 비슷한 창업 시기의 멀쩡한 경쟁사를 짝지어 무엇이 달랐는지를 물었다. 결론은 이렇다. "핵심 이념은 보존하고, 그 이념을 뺀 나머지는 끊임없이 자극해 진보시킨다." 다만 흔한 오해가 하나 있다. 장수기업들의 이념이 서로 비슷한 모범답안일 것이라는 짐작이다. 사실은 정반대다. 콜린스와 포라스의 명단에는 "환자가 먼저"인 제약회사와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내건 담배회사가 나란히 들어 있다. 거의 정반대의 세계관을 가진 두 회사가 둘 다 장수했다. 장수를 가른 것은 이념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진짜로 믿고 그대로 사는가였다.
세계에서 가장 극단적인 반례는 엔론이다. 2001년 파산 직전까지 이 회사는 본사 로비에 "존중·성실·소통·최고지향"이라는 네 가지 핵심가치를 큼지막하게 새겨두고 있었다. 그 문구가 걸려 있던 바로 그 시기에 경영진은 장부를 조작하고 있었다. 이념이 벽에 걸려 있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위험한 것은, 액자가 훌륭할수록 회사가 스스로를 속이기 쉬워진다는 점이다.
다티니의 장부에는 액자가 없었다. 매일의 거래 기록이 있었을 뿐이다. 이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결국 벽이 아니라 장부에서, 회의실이 아니라 현장의 하루하루에서 드러난다.
출처: 짐 콜린스·제리 포라스, 『Built to Last』(1994); 엔론 사태 관련 공개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