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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기업' 제18화>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 - 발렌베리 가문의 5대 승계

임윤철 · 2026.09.22

<'100년기업' 제18화>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 - 발렌베리 가문의 5대 승계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은 5대에 걸쳐 승계해온 유럽 최대의 산업 가문이다.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Esse, non videri)"를 가훈으로 삼아, 화려한 부호의 삶 대신 지주회사와 재단을 통한 절제된 지배를 택해왔다. 에릭슨·ABB·아스트라제네카 같은 세계적 기업들이 이 가문의 영향권 안에 있지만, 정작 발렌베리라는 이름을 아는 소비자는 많지 않다.

이 가문에는 흥미로운 규칙이 있다. 후계자가 실력이 미달이면 경영은 맡기지 않고 주주 역할만 준다. 가문은 중요한 결정에 거부권을 갖되, 이사회가 재가결로 그 거부권을 뒤집을 수 있다. 소유는 지키면서 독단은 막는 균형이다. 완전히 지분과 의결권을 분리한 재단형 구조보다는 느슨하지만, 개인의 인식에만 기대는 것보다는 훨씬 단단한 중간 단계다.

이 균형이 왜 중요한가. 캐나다의 두 연구자가 대형 장수 가족기업 24개사의 역사를 연구해 정리한 네 가지 경쟁우위 중 하나가 '명령(Command)' — 오너 경영자가 외부 주주의 눈치를 보지 않고 신속하고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는 것 — 이었다. 결정의 자유는 장수기업의 무기다. 그런데 견제 없는 자유는 다음 세대에서 독단이라는 독이 된다. 발렌베리의 설계는 이 자유를 죽이지 않으면서 그 어두운 면만 길들인 방식이다. 창업자 시절엔 하루면 되던 결정이 다음 세대에서 석 달 걸린다면, 무언가가 승계되지 않은 것이라는 말이 있다. 발렌베리 가문은 5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그 결정의 속도를 지켜왔다는 점에서, 승계가 사람만이 아니라 의사결정의 체질까지 물려주는 일임을 보여준다.

출처: 발렌베리 가문 관련 공개 자료; Danny Miller & Isabelle Le Breton-Miller, 가족기업 4C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