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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이 바꾼 역사와 문화

<제18화> 장사꾼들이 왕을 이겼다 — 도시들의 거래 동맹, 한자

임윤철 · 2026.07.29

<제18화> 장사꾼들이 왕을 이겼다 — 도시들의 거래 동맹, 한자

소상공인들은 대형 플랫폼과 협상하기 위해 연합회를 만들고, 소비자들은 공동구매로 값을 깎습니다. 뭉치면 협상력이 커진다는 이 원리로, 장사꾼들이 왕국을 전쟁에서 이긴 적이 있습니다. 왕을 뽑는 일에 거부권까지 얻어냈죠. 1370년 발트해 연안으로 가 보겠습니다.

1370년 5월, 발트해의 항구도시 슈트랄준트의 시청. 덴마크 왕국의 사절들이 굳은 얼굴로 앉아 있습니다. 맞은편에 앉은 것은 귀족도 장군도 아닌, 뤼베크를 비롯한 상인 도시들의 대표입니다. 몇 해 전 덴마크 왕이 한자 상인들의 무역 거점을 약탈하자, 도시들은 함대를 모아 전쟁을 벌였고 이겼습니다. 이제 사절들은 조약문에 서명해야 합니다. 배상금을 치를 것, 해협의 요새들을 15년간 넘길 것, 그리고 앞으로 덴마크 왕위를 계승할 때 한자 도시들의 동의를 받을 것. 사절이 떨리는 손으로 서명을 마치자, 상인 대표가 담담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대들의 땅을 원하지 않소. 안전한 뱃길과 정당한 관세,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오." 왕관 없는 자들이 왕관 쓴 자를 이긴 날이었습니다.

방금 보신 장면은 지금도 남아 있는 슈트랄준트 조약문을 근거로 상상해 본 것입니다. 한자동맹은 뤼베크를 중심으로 발트해와 북해의 상인 도시들이 맺은 연합으로, 전성기에는 약 200개 도시가 참여했습니다. 런던, 브뤼헤, 베르겐, 노브고로드에는 콘토르라 불리는 재외 상관을 두었으니 중세판 해외 지사망입니다. 노르웨이 베르겐의 목조 상관 거리는 지금도 남아 세계유산이 됐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동맹의 구조입니다. 헌법도, 상비군도, 수도도 없었습니다. 필요할 때 총회를 열어 결의하고, 말을 듣지 않는 상대에게는 칼 대신 더 무서운 무기를 썼습니다. 바로 거래 중단입니다. 동맹 도시 전체가 한 항구를 봉쇄하면 그 도시의 경제가 말라붙었으니까요. 이 느슨한 상인 네트워크는 그렇게 400년을 지속했습니다. 그들의 배도 한몫했습니다. 1962년 브레멘의 강바닥에서 1380년경의 화물선 코그가 통째로 발굴됐는데, 넓은 배 바닥에 청어와 소금과 모직물을 가득 싣던 이 배가 동맹의 핏줄이었습니다.

자, 오늘의 결론입니다. 기술은 세상의 장면과 장면을 바꿉니다. 도시 하나가 왕 앞에서 관세를 구걸하던 장면은, 200개 도시가 한목소리로 조약서를 내미는 장면으로 바뀌었습니다. 한자동맹의 발명품은 배도 상관도 아니라 연합이라는 구조 그 자체입니다. 흩어진 상인들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자 안전한 항로와 표준화된 거래 관행이라는 편리함이 생겼고, 왕국과 맞먹는 집단 협상력이 생겼습니다. 시장의 힘은 가게의 크기가 아니라 연결의 크기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들이 처음 증명한 셈입니다. 오늘의 협동조합과 공동구매, 그리고 국가들의 경제 연합까지 모두 이 원리 위에 서 있습니다. 5차산업혁명 시대에는 개인과 작은 회사들이 AI로 연결되어 거대 플랫폼과 맞서는 새로운 한자가 나타날 것입니다. "너는 뭐 먹고 살거니?"의 열여덟 번째 힌트는 이것, 혼자 협상하지 말고 연합을 설계하라, 네트워크가 곧 협상력이라는 것입니다. 철이네 오이마켓이 다음 장면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사진: RobKohl,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