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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철 칼럼]그 순무, 누구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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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예로부터 전해오는 민속 이야기가 있다. 봄에 씨앗 하나를 심은 농부, 그 무가 어찌나 잘 자랐는지 가을이 되자 혼자서는 도저히 뽑아낼 수 없을 만큼 거대해졌다. 농부는 두 손으로 무를 잡고 온 힘을 다해 당겼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부인을 불렀다. 부인이 농부의 허리를 붙들었다. 영차, 영차, 영차 — 안 된다. 마침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도 뒤에 붙었다. 셋이 온 힘을 다해 당겼지만 거대한 무는 꿈쩍도 않는다. 그때 마당 구석에서 졸고 있던 생쥐 한 마리가 터벅터벅 걸어와 아들의 옷자락을 잡았다. 넷이 함께 당기는 그 순간, 거대한 무는 마침내 쑥 뽑혔다.
이야기가 끝난 자리에서 진짜 질문이 시작된다. 저녁 식탁에 거대한 무가 올라오자 논쟁이 벌어진다. "내가 씨를 뿌리고 1년을 기다렸으니 내 몫이 가장 크다"는 농부, "밭을 갈고 물을 주며 무를 키운 건 나"라는 부인, "셋이서 도저히 안 될 때 결정적 힘을 보탠 건 나"라는 아들, 그리고 "내가 없었더라면 지금도 밭에 박혀 있었을 것"이라는 생쥐. 이야기는 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오래된 질문은 오늘 우리 현실에서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다시 등장한다.
오늘 중앙일보에 삼성전자의 초과이익 배분 문제를 다룬 컬럼이 실렸다. 동반성장의 오랜 주창자인 필자의 주장은 간명했다. 대기업이 초과이익을 낼 때, 그 이익에 기여한 협력사에도 의미 있는 몫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삼성전자 사장단은 "향후 5년간 5조 원을 조성해 상생 생태계 조성과 미래 인재 육성에 투자하겠다"는 입장문을 냈다. 2·3차 협력사 지원도 담겼다. 반가운 선언이다. 그러나 나는 그 발표를 읽으며 오히려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품게 됐다. 이것은 구조를 바꾸는 것인가, 아니면 일회성 시혜인가.
삼성 반도체 생태계에는 1차 협력사 1,061개, 2·3차 협력사 693개, 합산 1,754개 기업이 묶여 있다. 이번 5월 파업 위기 때 '반도체 생산 하루 멈추면 1조가 날아간다'는 경고는 이 협력사들의 연쇄 충격을 고스란히 포함한 수치다. 허프포스트는 이 구조를 정확하게 짚었다. "필요할 땐 '생태계'로 엮고, 이해관계 얽히면 '하청업체'로 배제한다." 이번 노사 합의로 DS부문 직원들은 연봉 1억 기준 최대 6억의 성과급을 기대한다. 정당한 권리다. 그런데 같은 이익을 만들기 위해 납품 일정을 사수하고 원가를 쥐어짜며 뛰었던 협력사들은 그 논의 어디에도 없었다. 이익을 만들 때는 함께, 나눌 때는 각자도생이다.
협력사가 충분한 이익을 남겨야 R&D에 투자할 수 있다. 우수한 엔지니어를 붙잡을 수 있다. 차세대 소재와 공정을 개발할 수 있다. 협력사의 기술 수준이 곧 삼성의 미래 경쟁력이다. 납품단가를 후려쳐 협력사 이익률이 낮아지면 당장의 원가는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5년, 10년 뒤에는 생태계 전체의 기술 경쟁력이 낮아진다. 삼성 혼자서 세계 최고의 반도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1,754개 협력사가 함께 쌓아올린 기술 생태계의 산물이다. 100년 기업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가치사슬 안에서 협력 파트너들이 성장할 수 있는 구조를 의도적으로 설계한다는 것이다. 초과이익을 협력사와 나누는 구조는 시혜가 아니라 생태계에 대한 재투자다.
성과 연동형 이익 배분, 납품단가 연동제의 실질적 확장, 초과이익 공유 구조의 제도화 — 이런 논의를 선언 수준을 넘어 구조 수준에서 시작해야 할 때다. 삼성의 5조 약속이 진정한 출발점이 되려면, 특별 기금에 앞서 일상의 납품단가 구조에서 협력사가 자신이 기여한 만큼의 과실을 가져가는 시스템이 함께 만들어져야 한다. 정책 당국도 납품대금 연동제를 넘어 초과이익 발생 시 협력사 이익을 연동하는 제도적 틀을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러시아 이야기 속 생쥐가 다음 해 가을에도 마당에 나타나게 하려면, 그 작은 기여가 제대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생쥐가 알아야 한다. 생태계는 선언이 아니라 구조로 유지되고, 구조로 확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