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바꾼 역사와 문화
<제23화> 눈에는 눈, 계약에는 계약서 — 함무라비의 진짜 얼굴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약관에 동의를 누르고, 분쟁이 나면 법원으로 갑니다. 거래를 법이 지켜준다는 이 믿음은 언제 시작됐을까요? 4부 '신뢰의 장치'의 첫 장면, 3,800년 전 바빌론으로 가 보겠습니다.
기원전 1750년경, 바빌론의 재판정. 상인 하나가 분을 못 이겨 소리칩니다. 은을 맡겨 장사를 보낸 대리인이 빈손으로 돌아와서는 이익이 없었다고 잡아뗀다는 것입니다. 판관이 대리인에게 묻습니다. "은을 받을 때 계약 서판을 썼는가?" 대리인이 우물거리자 판관은 광장 한복판의 검은 돌기둥을 가리킵니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돌에는 왕의 법 282개 조항이 빼곡히 새겨져 있습니다. 판관이 읽어 내려갑니다. 증인과 계약서 없이 맡긴 돈은 보호받지 못한다. 대리인이 상인의 돈을 떼어먹으면 세 배로 갚는다. 거꾸로 상인이 대리인을 모함하면 여섯 배로 갚는다. 판결은 그 자리에서 끝났습니다. 누구도 판관의 자비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값이 이미 돌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금 보신 장면은 함무라비 법전의 실제 조항들을 근거로 상상해 본 것입니다. 이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유명하지만, 진짜 얼굴은 따로 있습니다. 282개 조항의 대부분이 복수가 아니라 거래에 관한 것입니다. 곡물 빚의 이자는 3분의 1을 넘지 못한다는 이자율 상한, 뱃사공과 의사의 품삯을 정한 요금표, 맥줏값을 속이는 선술집 주인에 대한 벌칙, 그리고 방금 보신 위탁 거래의 배상 규정까지. 시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분쟁마다 값을 미리 공시해 둔, 돌에 새긴 거래 규정집이었던 셈입니다. 석비의 맺음말에는 왕의 의도가 또렷이 적혀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자는 내 석상 앞에 와서 이 비문을 읽고 자기 사건의 답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법을 신전 창고에 감춘 것이 아니라 광장에 세워 누구나 읽게 한, 공시의 발명이었습니다. 석비의 운명도 극적입니다. 훗날 이웃 나라 엘람이 전리품으로 뜯어갔고, 3,600년이 지난 1901년 프랑스 발굴대가 이란의 수사에서 세 동강 난 채로 찾아내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서 있습니다. 1화의 에아나시르가 활동하던 바로 그 시대, 화난 고객의 점토판 뒤에는 이런 법의 그물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자, 오늘의 결론입니다. 기술은 세상의 장면과 장면을 바꿉니다. 분쟁이 나면 힘센 쪽이 이기던 시장의 장면은, 돌에 새겨진 조항을 읽고 승복하는 장면으로 바뀌었습니다. 함무라비의 발명은 처벌이 아니라 예측 가능성입니다. 어기면 얼마인지가 미리 공개되어 있으면, 낯선 상대와도 셈이 서는 거래를 할 수 있습니다. 국가가 계약의 보증인이 되자 개인의 신용을 넘어서는 큰 거래가 가능해졌고, 계약서를 남기는 습관은 시장의 표준이 됐습니다. 오늘의 전자 약관과 표준 계약서, 소비자 보호법은 모두 이 검은 돌기둥의 후손입니다. "너는 뭐 먹고 살거니?"의 스물세 번째 힌트는 이것, 규칙이 선명한 시장에 돈과 사람이 모인다는 것, 그러니 규칙을 선명하게 만드는 일 자체가 장사라는 것입니다. 철이네 오이마켓이 다음 장면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사진: Rama, CC BY-SA 3.0 fr, via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