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바꾼 역사와 문화
<제4화> 후추 한 줌이 집 한 채 - 원산지를 숨겨라

지구 반대편 물건도 쉽게 구매합니다. 라벨에는 원산지를 표기합니다. 그런데 원산지가 국가 기밀보다 값진 비밀이던 시대가 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500년 전 스페인 세비야 부두로 가 보겠습니다.
1522년 9월, 세비야의 부두. 낡을 대로 낡은 배 한 척이 강을 거슬러 올라옵니다. 돛은 누더기가 되었고 선체는 물이 새어 쉼 없이 퍼내야 했습니다. 3년 전 다섯 척, 270명으로 떠났던 마젤란 원정대의 마지막 배, 빅토리아호입니다. 살아 돌아온 사람은 겨우 열여덟 명. 그들은 맨발에 촛불을 들고 성당으로 참회의 행렬을 올립니다. 그런데 부두의 회계관은 다른 곳을 보고 있습니다. 갑판 아래 곳간에서 올라오는 향긋하고 알싸한 냄새, 차곡차곡 쌓인 정향 자루들입니다. 장부를 넘기던 그가 낮게 중얼거립니다. "배 네 척과 사람 이백오십을 잃고도, 이 자루들이면 남는 장사라니."
방금 보신 장면은 원정에 동승해 살아 돌아온 안토니오 피가페타의 항해기록을 근거로 상상해 본 것입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빅토리아호가 싣고 온 정향은 약 26톤, 이 향신료만으로 3년 원정의 비용을 갚고도 이익이 남았습니다. 대체 향신료가 왜 그렇게 비쌌을까요? 답은 물건이 아니라 '정보'에 있었습니다. 이미 기원전 5세기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아랍 상인들이 계피의 원산지를 감추려고 퍼뜨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계피는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절벽, 거대한 새의 둥지에서만 구할 수 있다는 신화입니다. 원산지를 모르는 손님에게는 부르는 게 값이었으니까요. 중세에는 베네치아가 지중해 길목을 쥐고 후추 무역을 독점했고, 유럽에서 후추알은 집세와 세금, 지참금으로 통용될 만큼 귀했습니다. 반전은 1498년에 시작됩니다. 바스쿠 다 가마가 나침반과 개량된 범선, 새로 그린 해도를 들고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까지 직항로를 열자, 리스본의 후추값은 베네치아를 크게 밑돌았습니다. 다 가마 역시 선원 대다수를 괴혈병으로 잃는 혹독한 항해를 치렀지만, 싣고 돌아온 향신료의 값은 원정 비용의 수십 배에 달했다고 전해집니다. 천 년을 버틴 정보 독점이 항해술이라는 신기술 앞에서 무너진 것입니다. 절벽 위 괴조의 둥지 이야기도 그날로 값어치를 잃었습니다.
자, 오늘의 결론입니다. 기술은 세상의 장면과 장면을 바꿉니다. 중개상이 신화로 원산지를 감추고 부르는 게 값이던 시장의 장면은, 항로가 열리자 소비자가 리스본과 베네치아의 값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장면으로 바뀌었습니다. 항해술이라는 신기술이 시장에 들어온 것은 더 싸게 산다는 편리함과, 비교하고 선택하겠다는 소비자 협상력의 욕망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정보를 감춰서 버는 돈은 길이 뚫리는 순간 끝납니다. 오늘날 가격비교 사이트와 해외직구가 하는 일이 정확히 그것이고, 5차산업혁명 시대의 AI는 그 비교를 사람 대신 해줄 것입니다. "너는 뭐 먹고 살거니?"의 네 번째 힌트는 이것, 정보의 벽으로 돈을 벌려 하지 말고 벽을 허무는 쪽에 서라는 것입니다. 철이네 오이마켓이 다음 장면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사진: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 1590년작 (퍼블릭 도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