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바꾼 역사와 문화
<제9화> 저울 대신 사자 도장 — 세계 최초의 동전

만 원권을 받으면서 지폐를 저울에 달아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돈을 셀 뿐, 검사하지 않죠. 그런데 돈을 받을 때마다 저울과 시금석부터 꺼내야 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2,600년 전, 오늘날 튀르키예 땅에 있던 왕국 리디아로 가 보겠습니다.
기원전 600년경,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의 시장. 포도주 한 항아리를 팔던 상인이 손님이 내민 금가루 주머니 앞에서 한숨을 쉽니다. 저울을 꺼내 무게를 달고, 검은 시금석에 금을 그어 순도를 살피고, 그래도 미덥지 않아 눈살을 찌푸립니다. 팍톨로스 강에서 캐낸 사금은 금과 은이 제멋대로 섞여 있어 같은 무게라도 값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거래 한 번에 흥정 반, 검사 반. 그때 왕의 관리가 시장에 나타나 콩알만 한 금속 조각을 내보입니다. 표면에는 울부짖는 사자의 얼굴이 찍혀 있습니다. "오늘부터 이것이 돈이오. 무게도 순도도 왕이 보증하니, 그대들은 저울을 치우고 사자만 세면 되오." 상인은 반신반의하며 조각을 받아 들지만, 곧 깨닫습니다. 검사하는 시간이 사라지자 하루에 두 배를 팔 수 있다는 것을.
방금 보신 장면은 실존하는 기록과 유물을 근거로 상상해 본 것입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 1권에서 리디아인이 인류 최초로 금화와 은화를 만들어 썼고, 최초의 소매상인이기도 했다고 적었습니다. 실물도 있습니다.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터를 발굴하자 기초 밑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전들이 쏟아져 나왔고, 지금 대영박물관 등에 있습니다. 사자 문양이 찍힌 이 일렉트럼 주화는 왕의 각인으로 무게와 순도를 보증한 최초의 표준 화폐였습니다. 순도를 가리던 검은 돌이 지금도 '리디아의 돌', 시금석으로 불리는 이유죠. 뒤를 이은 크로이소스 왕은 사르디스의 제련소에서 금과 은을 분리하는 공법까지 완성해 순금화와 순은화를 찍었고, 그 부는 "크로이소스만큼 부유하다"는 관용구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습니다. 그 크로이소스는 "전쟁을 일으키면 큰 제국이 무너지리라"는 델포이 신탁을 믿고 페르시아를 쳤다가 패망합니다. 무너진 큰 제국은 자기 나라였던 겁니다. 돈은 남았고, 왕은 사라졌습니다.
자, 오늘의 결론입니다. 기술은 세상의 장면과 장면을 바꿉니다. 거래마다 저울과 시금석으로 상대를 검사하던 장면은, 사자 도장 하나로 값을 세기만 하는 장면으로 바뀌었습니다. 동전의 발명은 금속의 발명이 아니라 검증의 외주화입니다. 국가가 검사 비용을 대신 치러주자 거래는 빨라졌고, 소액 동전 덕에 서민들까지 시장에 들어와 흥정할 수 있게 됐습니다. 헤로도토스가 최초의 주화와 최초의 소매상을 한 문장에 적은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검증이 싸지면 시장이 커집니다. 오늘의 정품 인증, 공인 인증서, 블록체인 검증이 하는 일이 정확히 그것이고, 5차산업혁명 시대에는 AI가 만든 콘텐츠와 데이터의 진위를 보증하는 '디지털 사자 도장'이 거대한 장사가 될 것입니다. "너는 뭐 먹고 살거니?"의 아홉 번째 힌트는 이것, 남들의 의심을 대신 없애주는 사람이 시장의 문을 연다는 것입니다. 철이네 오이마켓이 다음 장면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사진: brewbooks,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