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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철 칼럼]3년 100조 원의 무게, 출연연은 ‘존재의 이유’를 증명할 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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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과학기술계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마주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연구 현장을 옥죄어 온 과제중심제도(PBS)의 폐지가 가시화되면서, 과학기술계가 그토록 갈망하던 ‘연구의 자율성’이 마침내 눈앞에 다가왔다. 여기에 더해 2026년부터 2028년까지 3년간 투입될 정부 R&D 예산은 누적 100조 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연구자 1인당 가용 예산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 수준에 도달할 것이며, 이는 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에 있어 유례없는 축복이자 동시에 가장 엄중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이 거대한 변화의 파고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국민의 소중한 세금이 3년간 100조 원이나 투입된 후, 우리 삶은 무엇이 나아졌는가?"라는 질문에 당당히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마도 정부와 국회, 그리고 무엇보다 주권자인 국민은 머지않아 이 질문을 던질 것이다. 아니, 이미 그 질문은 시작되었다.
자율의 대가, '책임'이라는 이름의 성적표
PBS 폐지는 연구자가 예산 확보를 위해 여기저기 과제를 구걸하러 다니던 ‘생계형 연구’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제 연구자는 스스로 연구의 방향을 정하고, 긴 호흡으로 난제에 도전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율을 확보하게 된다. 하지만 자율은 공짜가 아니다. 자율의 뒷면에는 반드시 ‘책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지금까지는 "PBS 때문에 단기 성과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이 통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제도가 바뀌고 역대급 예산이 뒷받침되는 순간, 모든 화살은 출연연의 내부 역량과 결과물로 향할 것이다. 이제 출연연 원장들은 예산 확보라는 기술적 경영을 넘어, "우리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내놓아야 하는 철학적 경영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100조 원의 결과물, '논문'이 아닌 '임팩트'여야 한다
우리는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수천 건의 특허와 수만 편의 논문 숫자로 100조 원의 가치를 설명하려 든다면 국민은 더 이상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이 체감하는 성과란 결국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거나, 무너져가는 산업 생태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실질적 기여'다. 결국 해답은 '기술사업화'에 있다. 연구실 안에서 완결된 기술이 아니라, 시장으로 나가 산업 생태계를 혁신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살아있는 기술을 증명해야 한다. 100조 원의 투입이 대한민국을 Physical AI의 선도국가로 만들었는지, 초고효율 에너지 사회로 진입시켰는지, 혹은 우리 중소·중견기업들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는지를 숫자가 아닌 '현장의 변화'로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의 기술사업화 체계, 이대로 충분한가?
뼈아픈 자성이 필요한 지점이다. 과연 현재 출연연의 기술사업화 체계가 100조 원 시대의 결과물을 담아낼 만큼 견고하고 효율적인가? 여전히 많은 기관이 기술이전 계약 건수나 기술료 수입이라는 단기 지표에 매몰되어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진정한 기술사업화는 기술을 넘기는 행위(Transfer)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산업 생태계에 안착하여 가치를 창출하는 과정(Commercialization) 전체를 설계하는 일이다.
출연연 원장들은 이제 다음의 과제를 즉시 준비해야 한다.
첫째,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의 체계 전환이다. 연구자가 개발한 것을 파는 것이 아니라, 시장과 산업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난제를 연구자가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해결하게 하는 구조다.
둘째, 기술사업화 전문 조직의 고도화다. 단순히 행정적 뒷받침을 하는 수준을 넘어, 비즈니스 모델을 설계하고 민간 자본과 결합해 스케일업을 주도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셋째, 지역 산업 생태계와의 결합이다. 100조 원의 예산이 중앙에만 머물지 않고, 지역의 특화 산업과 Physical AI 등 첨단 기술이 융합되어 지역 경제를 살리는 마중물이 되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증명의 시간은 머지않았다
3년은 짧은 시간이다. 100조 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집행된 후 맞이할 2028년, 우리는 어떤 성적표를 내밀 것인가. 출연연 원장들에게 주어진 숙제는 명확하다. 확보된 자율을 바탕으로 연구 현장의 역동성을 회복시키고, 그 에너지가 기술사업화라는 통로를 통해 산업계로 거침없이 흘러가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회와 경제에 기여했음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과학기술계가 누리는 자율과 예산은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다. 지금 바로 물어야 한다. "우리는 100조 원의 무게를 견딜 준비가 되었는가? 그리고 그 가치를 국민에게 어떻게 확인시켜 줄 것인가?" 기술사업화의 패러다임 전환이 그 해답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