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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철 칼럼]승계는 사람을 잇는 일이 아니라 기준과 철학을 잇는 일이다

임윤철 · 2026.01.16

[임윤철 칼럼]승계는 사람을 잇는 일이 아니라 기준과 철학을 잇는 일이다

독일의 머크는 1668년에 설립된 이후 35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남았다. 일본에는 100년, 200년을 넘어 500년 이상 존속한 기업들이 적지 않다. 이들 기업을 두고 흔히 ‘장수기업’이라 부르지만, 그들의 진짜 공통점은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 아니다. 어떻게 승계를 이해하고 준비해 왔는가가 이 기업들을 구분 짓는다.

이 비교는 오늘날 한국 기업들이 왜 승계 앞에서 흔들리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 누가 물려받느냐보다 무엇을 물려주느냐

우리나라에서 기업 승계 이야기가 나오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질문은 늘 같다. 자녀가 이어받을 수 있는가, 전문경영인을 세울 것인가, 지분은 어떻게 나눌 것인가. 승계는 철저히 사람과 소유의 문제로 다뤄진다.

그러나 머크와 일본 장수기업의 질문은 다르다. 이들은 먼저 묻는다. 이 기업에서 절대 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은 무엇인가. 머크는 이를 기업 철학과 판단 기준이라 정의했고, 일본 기업들은 가훈과 상도, 사회적 역할로 정리했다. 사람은 바뀔 수 있지만 기준과 철학은 이어져야 한다는 전제다.

■ 승계는 사건이 아니라 교육 과정이다

머크의 승계는 어느 날 갑자기 결정되지 않는다. 일본 장수기업도 마찬가지다. 이들 기업에서 승계는 인사 이벤트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학습 과정이다. 가족 구성원은 기업의 성공뿐 아니라 실패의 역사, 사회적 책임, 기업이 위기를 넘긴 이유를 반복적으로 교육받는다.

반면 우리 기업의 승계는 대개 창업주 고령, 건강 문제, 세금 이슈가 터진 뒤에야 논의된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택지를 찾다 보니 결국 매각이라는 결론으로 흘러가기 쉽다. 교육 없는 승계는 거의 예외 없이 실패한다는 점을 이들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 가족의 역할을 다시 정의하다

머크 가문은 오래전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가족이 반드시 경영을 할 필요는 없지만, 기업의 방향을 잃지 않게 할 책임은 가족에게 있다는 인식이다. 일본 장수기업에서도 가족은 매출 책임자가 아니라 가치와 철학의 수호자로 교육된다.

우리 기업은 가족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요구해 왔다. 네가 대표를 맡아라, 아니면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라는 식이다. 머크와 일본 기업은 그 사이의 역할을 만든다. 가족을 경영자가 아니라 정체성의 관리자로 키운다.

■ 전문경영인은 숫자가 아니라 의미를 인수한다

머크에서 전문경영인이 이어받는 것은 지분이나 권한이 아니다. 그가 인수하는 것은 기업이 사회에서 수행해 온 역할과 판단의 기준이다. 일본 기업 역시 대표는 이익을 내는 사람 이전에, 왜 이 회사가 아직 존재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기업에서 전문경영인이 불안한 이유는 통제력이 약해서가 아니다. 기업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미 없는 권한은 언제든 흔들린다.

■ 기업을 자산이 아닌 시간의 축적으로 보다

머크와 일본 장수기업은 기업을 개인의 재산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들은 기업을 세대가 잠시 맡아 관리하는 시간의 축적물로 인식한다. 그래서 당대의 최대 이익보다 다음 세대의 선택 가능성을 남기는 데 더 큰 가치를 둔다.

우리 기업이 쉽게 팔리는 이유는 시장 환경 때문만이 아니다. 기업을 지금 내 것으로만 인식해 온 결과이기도 하다.

■ 한국 기업에 남는 질문

머크와 일본 기업의 비교는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우리는 승계를 가르치고 있는가.

가족을 위한 교육이 있는가, 임직원 중 차기 리더를 키우는 과정이 있는가, 대표가 기업 철학과 비전을 학습하는 체계가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기업은 규모와 무관하게 결국 시장에 나온다.

승계는 사람을 잇는 일이 아니다. 기준과 철학을 잇는 일이다. 머크와 일본 장수기업이 한국 기업에 남기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