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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철 칼럼]예타 이후의 질문, 이제는 ‘기술사업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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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타는 필요했지만, 환경은 변했다
국가 재정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과학기술 예산에 대한 예비타당성조사, 이른바 ‘예타’ 제도는 분명 필요했다.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는 대규모 연구개발 사업에 대해 최소한의 검증 장치를 두는 것은 정부의 기본 책무다. 특히 재정 여력이 넉넉지 않았던 시기에는 예타가 ‘낭비를 막는 안전장치’로 작동해 왔다. 다만 제도는 시대와 함께 진화해야 한다. 기술 패권 경쟁이 일상화된 지금, 과거의 속도와 기준으로 미래 산업을 재단하는 순간 국가의 성장 엔진은 둔화될 수밖에 없다.
숫자로 설명되지 않는 기술의 가치
연구개발 투자 건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예타에 소요되는 시간은 길어졌고, 의사결정의 핵심 지표로 쓰인 B/C ratio는 과학기술 R&D의 본질과 점점 어긋나기 시작했다. 비용(cost)은 비교적 명확하다. 인건비, 장비비, 운영비는 숫자로 계산할 수 있다. 그러나 편익(benefit)은 다르다. 기술의 파급효과, 산업 생태계 변화, 미래 시장 창출 가능성은 단기 수치로 환산하기 어렵다.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가치가 커질수록 예타에서는 불리해졌고, 많은 사업이 탈락과 재도전을 반복했다. 그 사이 1~2년은 쉽게 흘러가고, ‘착수 시점’이 곧 경쟁력인 분야에서는 그 지연이 치명적인 손실이 된다.
잃어버린 시간의 책임
예타는 필요했지만, 변화한 환경을 반영해 진작에 없애거나 대체 장치를 도입했어야 했다. 과학기술계가 오랫동안 문제를 제기했음에도 정책 결정은 지연됐다. 과학기술부는 더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했고, 기획재정부는 ‘나라 살림’을 이유로 차일피일 미뤘다. 그 결과 우리는 최소 5년 이상의 시간을 잃었다. 기술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과학기술도 경제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핵심 의사결정을 좌우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결국 지연의 비용은 연구 현장과 산업계, 그리고 국민 경제가 치르게 된다.
스타트업 생태계의 보이지 않는 병목
지금 우리나라가 경제를 살릴 기회를 스스로 흘려보내고 있다는 느낌은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더 뚜렷하다. 자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금이 ‘흐르지’ 않는다. 자금을 출자하는 LP(출자자, Limited Partner)는 연기금·공제회·금융기관처럼 안정성을 우선하는 투자자다. 그들이 맡긴 돈을 실제로 운용하는 GP(운용사, General Partner)는 벤처캐피털 운용사로, 성과가 정량화되고 보수와 연동되기에 매출 규모와 지속가능성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 구조에서 매출이 아직 없는 초기 기술 스타트업은 투자 의사결정의 가장 뒤편으로 밀린다.
PoC, 가장 중요한데 가장 취약한 단계
스타트업이 아이디어를 제품이나 서비스로 구현해 기술적·사업적 가능성을 검증하는 단계가 PoC(개념검증, Proof of Concept)다. 기술이 ‘실제로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고객이 ‘정말 원하는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PoC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실패를 통해 고치고, 다시 시험하고, 성능과 비용을 맞추는 반복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구간은 불확실성이 가장 크기 때문에 민간 투자 시장에서 자금이 거의 공급되지 않는다. 즉, 성장의 출발선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를 통과할 연료가 부족한 것이 스타트업 생태계의 핵심 문제다.
예타 이후, 정부 예산의 새로운 역할
예타가 사라진 지금 정부 예산은 ‘기술사업화의 병목’에 맞춰 설계돼야 한다. 핵심은 정부가 예산을 직접 집행하기보다 민간이 운용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기존 TIPS처럼 민간 운용사가 PoC 전용 예산을 선별·집행하고, 정부는 투명한 기준으로 성과를 관리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민간은 시장과 기술을 함께 보고 빠르게 판단할 수 있고, 정부는 개별 과제의 미시적 판단에서 벗어나 포트폴리오 관점에서 성공과 실패를 관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속도’와 ‘책임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다. 예타 폐지가 속도만 남기고 책임을 잃는 제도로 오해되지 않으려면, 사전 기획·단계별 검증·사후 성과관리의 체계를 더 정교하게 가져가야 한다.
연구개발자를 위한 기술사업화 교육이 인프라다
여기에 반드시 병행돼야 할 요소가 있다. 연구개발자를 대상으로 한 체계적인 기술사업화 교육이다. 연구개발자에게 “비즈니스를 하라”고 요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신이 개발하는 기술이 어떤 산업 구조에서 쓰이는지, 고객은 누구인지, 규제·인증·조달·유통의 문턱은 무엇인지, 기술이 제품이 되기까지 어떤 단계와 비용이 필요한지 정도는 이해해야 한다. 같은 연구라도 시장을 이해한 연구개발자가 접근할 때 ‘개발할 것’과 ‘개발하지 말아야 할 것’이 더 빨리 구분되고, 결과적으로 국가 R&D의 효율이 높아진다. 이는 연구자의 부담을 늘리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연구의 방향과 밀도를 올리는 투자다. 정부는 연구비를 ‘집행’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연구자가 시장과 연결되는 사고를 갖추도록 돕는 교육·멘토링·현장 연계 프로그램을 표준 인프라로 만들어야 한다.
2026년 1월, 속도에 맞는 사고로
2026년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기술 발전으로 시간의 속도감은 더 빨라졌다. 예타 폐지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제도를 바꿨다면 사람과 구조도 함께 바꿔야 한다. 정부의 틀을 ‘공무원을 일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연구개발자가 비즈니스 성과를 내는 방향’으로 설계해야 한다. 이 기회를 또 놓친다면, 그 책임은 더 이상 제도 탓으로 돌릴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