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사업화 인사이트
[임윤철 칼럼] 설날 명절 아침에
![[임윤철 칼럼] 설날 명절 아침에](https://cdn.coenworks.com/Files/399/News/202602/6859_20260215111430188.jpg)
적토마 타시고 새해에 건승을 기원합니다, 독자여러분!!
한 그릇의 기억, 설날 식탁의 기술
설날 아침의 부엌은 소리로 먼저 시작된다. 전이 팬 위에서 지글지글 익는 소리, 간장에 파를 송송 썰어 넣는 소리, 밥솥에서 김이 빠져나오는 소리. 누군가에게 명절은 차례의 형식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설 냄새를 맡는 시간’이다. 외국인이 K‑food를 떠올릴 때 비빔밥이 늘 상위권에 오른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자주 듣는다. 한 그릇 안에 나물과 고기, 달걀, 고추장이 모여 각자의 맛을 잠시 내려놓고 숟가락 한 번에 합이 되는 음식. 이해하기 쉽고, 변주가 가능하고, 무엇보다 “섞임” 자체가 정체성인 음식이다.
팬 위에서 완성되는 ‘합’의 철학
명절 음식도 같은 문법을 공유한다. 빈대떡은 녹두를 갈아 만든 반죽에 고기와 김치, 채소를 섞고 기름과 열로 마무리한다. 똥그랑땡은 다진 고기와 두부, 채소를 한 덩어리로 엮은 뒤 달걀물을 입혀 ‘겉과 속’이라는 새로운 질감을 만든다. 잡채는 당면이라는 탄수화물 위에 버섯과 시금치, 당근, 양파, 고기를 올려 각자의 색을 살리면서도 마지막에 간장과 참기름으로 하나의 향에 묶는다. 이 음식들은 단일 재료의 순수성을 자랑하지 않는다. 대신 서로 다른 재료가 서로의 빈틈을 메우도록 설계한다. 그래서 한식의 믹스는 편의가 아니라 기술이다.
레시피는 발명일까, 발견일까
여기서 궁금해진다. 우리는 ‘잡채’라는 결과를 알고 그에 맞춰 재료를 준비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누군가가 ‘잡채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을까, 아니면 상 위에 흩어진 재료를 어떻게든 맛있게 엮다가 잡채가 되었을까. 빈대떡도 마찬가지다. ‘녹두를 갈아 전을 부치자’는 발상이 먼저였는지, 혹은 남는 곡식과 채소를 한데 섞어 배를 채우는 지혜가 먼저였는지. 아마 답은 하나가 아닐 것이다. 어떤 날은 발명이 발견을 부르고, 또 어떤 날은 발견이 발명을 자극한다. 한 번의 시도가 가족의 “오, 괜찮다”라는 합의로 레시피가 되고, 그 레시피는 또 다른 집의 냉장고 사정과 손맛을 만나 버전이 된다. 한식은 ‘정답’보다 ‘버전’을 축적해 온 문화다. 그래서 ‘우리 집 잡채’가 곧 ‘우리 집 역사’가 된다.
설날 식탁은 작은 실험실
설날 아침에 더 뚜렷해지는 장면이 있다. 누군가는 고추장을 조금 더 넣고, 누군가는 간장을 줄인다. 누군가는 부추를 듬뿍, 누군가는 숙주를 생략한다. 이 작은 조정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다음 해의 표준이 된다. 식탁은 과거를 재현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미래를 시험하는 실험실이다. 혼합은 타협이 아니라 창조다. 서로 다른 것을 한 접시에 올려놓고, 한 번 더 섞어 “새로운 하나”를 만드는 과정. 설날의 전 냄새 속에서 우리는 늘 ‘다음 버전’을 준비해 왔다.
기술사업화도 ‘섞임’의 언어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기술사업화라는 말을 떠올려 본다. 기술사업화는 연구가 끝난 뒤 ‘포장’을 입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설날 식탁에서 일어나는 발견과 발명의 과정과 닮아 있다. 연구실에서 태어난 기술은 ‘원천 맛’이 강하다. 그러나 고객의 입맛—즉 현장의 제약, 가격, 사용성, 규제, 유지보수—을 만나면 그대로는 먹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기술의 핵심을 버릴 수도 없다. 결국 필요한 것은 섞임의 설계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낼지, 어떤 기능을 전면에 세울지, 어떤 사용 시나리오에 맞춰 형태를 바꿀지. 실험 → 피드백 → 조정 → 재실험의 순환 속에서 기술은 제품이 되고, 제품은 서비스가 되며, 서비스는 시장의 습관이 된다.
한식 레시피가 ‘발명’과 ‘발견’의 왕복운동으로 완성되듯, 기술사업화 역시 고객과 시장이라는 식탁 위에서 완성된다. 고객의 입맛에 맞춰가는 과정은 결코 기술의 후퇴가 아니다. 오히려 기술이 현실의 언어를 배우는 성장이다. 설날 아침, 우리는 서로 다른 재료를 섞어 하나의 맛을 만든다. 기술사업화도 마찬가지다. 기술과 시장을 섞어, 세상이 다시 찾게 되는 ‘다음 버전’을 만드는 일. 그게 기술사업화의 본질이다.